십수년 전 감성이 갑자기 돌아와, 뒤적뒤적 케이스 다 깨진 옛날 CD들과 떨어지지도 않는 오래된 먼지가 들러붙은 책들을 꺼내보고 있는데, 문득 유언이 손에 잡혔다.

절반쯤 읽은 후에, 모양에게, 책 이야기를 해주었다.




박 :  부지런히 유의미하게 살 성격은 못 되지만 이번 주는 인생을 허비하는 것 같아서 우울했다.

나 :  오늘 아침엔 산도르 마라이 유언을 꺼내서 절반 정도 읽었어.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던지는 질문이, 뭐라고 해야하나,

박 :  인생의 의미가 뭐래?  너무 궁금했어.

나 : 모순적이라고 해야 하나. 반을 마저 읽고 나면 이야기해줄께.
어느 성실하고 보통의 집안에 매력적인 사기꾼 하나가 기어들어와서 집안을 들어먹었는데, 그런 뒤 25년만에 돌아와서 딱 하나 남은 집 마저 탈탈 털어 먹는데, 그 집에 살던 둘째딸이, 그 사기꾼이야 말로, 평온하고 의미없던 삶의, 유일한 진실한 의미라고 자꾸 개소리를 하는, 절반까지 밖에 못읽었다.

박 :  아.. 근데 그 둘째딸은 참..

나 :  둘째딸이 화자라서 걔말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으나, 사기꾼이 참으로 매력적이라 온동네가 그 사기꾼에 놀아나네. 양복점 주인은 20년된 양복값 청구서를 와서 바치고 판사 친구는 또 푼돈을 너무나 자연스레 뜯기고 온 동네가 그 사기꾼을 흥겹게 맞아들여 놀아난다는데, 어찌 알겠어. 1900년 무렵 오스트리아 근방 사람들의 도덕과 신념과 감성을. 이해하기엔 너무 멀다. 그래도 반드시 (인생의 의미를) 찾아내어서 네게 알려주마.

박 :  근데 2016년 한국에서도 그런 사기꾼들한테 뭔가 교묘하게 뜯기며 내 것을 다 갖다바친다는 생각이 들긴 한다.

나 :  응 그럴지도.  여튼 오늘도 왜 사냐까지 가면 너무 머니까 왜 일해야하나 정도에서 헤매는 중

박 :  나도.




[다음날 계속]



나 : 어제 이야기하던 산도르 마라이의 유언, 후반부가 어떠냐면, 그러니까 결국 그 개새끼가, 원래 여주인공이랑 사랑하다가 그 언니와 결혼을 해서 애 둘을 낳고 살다 언니가 먼저 죽었는데, 그 언니가 죽을 때 남긴 집안의 가보 반지를, 그 딸을 주지 않고 여주인공을 줘서, 여주인공이 '그럼 내가 담에 조카딸을 줄께', 했었는데, 사실은 언니가 죽기 전에 이미 반지는 팔아치웠고 그 반지는 가짜였던 거지. 그랬는데 15년 만에 돌아오면서 그 조카딸이 결혼 지참금이 필요한 상황이 되자 딸에게 '니 이모가 니 엄마가 받은 아주 비싼 반지 갖고 있으니 달라고 하렴' 하고 와서 그 딸이 아빠말을 믿고 이모 반지 내놔 하니 여주인공이 기함한 거야. 그러나 조카딸의 정서를 배려하여 '난 그 반지 줄수 없어' 라고 하니 조카딸은 완전 화나서 나가버리고 그 뒤를 이어 개새끼가 와서 이야기해.
 "너는 나의 성품이고 도덕성이었어. 니가 나를 저버려서 나는 도덕성을 갖출 수 없었어."
 "세상에는 일어나기 마련인, 언젠가 일어나야 하는 일들이 있어. 그런 법칙이 있어. 그러니 니 집은 내가 팔아 치우고, 너는 빈민구호소로 가도록 해"
 라고 말했는데, 여주인공이 수긍하지. 그리고 말리는 친구에게 말해.
"내가 정말 현명하고 용감했다면, 나는 이십오년 전에 저 사기꾼 거짓말쟁이와 함께 도망쳤을 거야. 그러지 않아서 나는 인생의 진실한 의미를 놓쳐버렸어"
 라고. 그리고 소설이 끝이 나.
 산도르 마라이는 좀 그런 주제가 많아. 어느 노년의 평온한 인생에 청춘의 개새끼가 찾아와. 그리고 평온한 삶을 살아온 주인공들이 잃어버린 인생의 열정, 알맹이, 진실한 의미, 이런 걸 아쉬워하고 후회하고 삶을 탈탈 털어버려.

박 :  아...  무슨 말인지 좀 알겠다.

나 :  그런 열정을 만나보지 못해서 내게는 그냥 개새끼들일 뿐이네.

박 :   그래서 어릴 때 젊을 때 뭐가 없을 때  이꼴 저꼴 당해보고 이새끼 저새끼 다 만나보고 그런 허상 같은 건 없다는 걸 알아야 하는 건가..라는 상투적인 메세지를 담고 있는 건 아니겠지. 뭔가 고차원적인 게 있는 거겠지.

나 :  그런 건 아닌 거 같애. 그냥 인생이 남들 보기엔 폭망이라도 열정을 건지는 것이 더 의미가 있었을지도 몰라, 라는 거 아닐까?

박 :  아...  나는 싫은데 그런 폭망.

나 :  나도 인생의 평화가 더 좋아. 기회가 있다면 언제라도 평화쪽을 선택할 거야. 아마 백퍼. 그러고서 마라이처럼 이런 얼토당토 않은 망상을 즐기는 걸 선택하겠어.


박 : 그게 현명해. 두말 할 것 없어. 인생은 그렇게 사는 게 맞아.

나 :  응 근데 문장들이 기막히게 아름답다. 유려하다, 라는 표현을 길다랗게 늘여쓴 것처럼.

박 :  기회가 되면 나도 그 유려함을 만끽하마.

나 : 니 취향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사놓고 재독은 이번이 처음인 거 같은데 다시 읽으면서 그래 내가 좋아해서 모을만한 작가였네 싶다.


박 :   일단 간다, 저녁 회식. 아아아  가기 싫다.

나 :  그래 난 어제 했다. 견디고 평온을 지켜. 홧팅

박 : 사기꾼 이야기를 듣고나니  이상하게 평온해진다. 고마워

나 :  그래 이상한데서 위로를 얻는구나.






최대한 했던 말 그대로 편집했다. 원래 나는, "개새끼" 이런 표현은, 입에 올리지도 않고, 글로도 쓰지 못하는 얌전한 아가씨인데, 살다보니 예전의 "빌어먹을" "젠장" 정도로는 주변에서 감흥이 없다고들 하여, 우선 글로 먼저 강한 표현들을 익히는 중이다. 거칠다고 오해하지 말아주시길.

Posted by 구이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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